| 로그인 | 회원가입 | 장바구니 | 주문조회 | 마이페이지

 
 
 
 
 직녀이야기
 
 
 
 

 
작성일 : 12-11-03 14:18
우연히 만난 반가운 얼굴
 글쓴이 : 직녀
조회 : 5,989  

임하면 사의 출신 카툰작가 이영우

카툰작가 이영우(43세)씨를 만나러 가기로 한 날이 추?� 며칠 앞둔 때라 빈손으로 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만화작가라고 하니 뭔가 특별한 선물을 해야 하지 않을까 취재 걱정보다 선물 고민이 먼저 되었다. 며칠 동안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드디어 근사한 것을 발견했다. 매년 이맘 때 쯤에 우리 베란다 앞을 특별하게 하는 나팔꽃이 바로 그 선물이었다. 남보랏빛의 작은 나팔꽃이 그에게도 흐뭇한 미소와 즐거운 상상력을 가져다주길 바라며 나팔꽃씨를 작은 통에 가득 담아 선물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내년 봄 화분에 꼭 심어보겠다고 했다. 그 꽃씨를 통해 멋진 작품도 나오길 내심 기대해 보았다.
“아직까지는 가야 할 길도 멀고 그럴 인물이 안 되는데 전화가 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나중에 카툰협회 회장이 되고나서 하면 안 되겠냐고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되었습니다.”

무척 쑥스러워하며 안동지에 소개될 법한 인물이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현재 아시아경제신문 일러스트 기자로 팀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카툰협회 부회장이고 카툰창작모임 ‘엎어컷’의 회원으로 다수의 카툰전시회와 개인전을 열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주목받는 카툰작가이다.
임하면 사의리가 고향인 그는 임동중학교와 경안고등학교를 나왔고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만화과를 개설한 공주전문대(현 공주대학교) 만화예술과를 졸업했다. 70년생이라 같은 시기에 안동에서 학교를 다닌 인연 때문인지 친구처럼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대화중에 간간이 아는 인물들도 나와서 더 반갑고 즐거웠다.

“만화하고 카툰은 어떻게 다른가요?”
“한 컷의 만화, 이게 카툰이라고 보시면 돼요. 만화라는 장르 안에 카툰이 있고 코믹스, 즉 극화만화가 있어요. 장편만화 단편만화가 코믹스에 속하죠. 카툰을 학문적으로 이야기하면 풍자와 유머로 이루어진 한 컷에서 한 페이지까지의 만화라고 정의 내려요. 특징적인 것은 풍자와 유머가 있다는 것이죠. 흔히 신문에 만평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걸 정치카툰이라고 하죠. 주제별로 나누자면 정치카툰, 생활카툰, 유머카툰 이렇게 말할 수 있구요. 어쨌든 한 컷 안에 모든 상활들이 다 들어가는 만화가 카툰입니다.”
 


‘동물카툰’하면 ‘이영우’
그는 2010년도에 개인 카툰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전시회 제목은 ‘Animal이었다.
“제가 어떻게 하다 보니 동물을 소재로 한 카툰을 많이 했어요. 그냥 동물들이 좋아요. 지금은 동물카툰 하면 이영우 할 정도가 되었어요. 동물이 주인공인 작품이 100여 개가 넘을 거예요. 그걸로 내년쯤에 책을 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정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잠깐 그의 지난 전시회 팸플릿을 펼쳐보는데 귀여운 동물들의 모습이 친근하고 또 색상이 밝고 화려해 눈에 쏙 들어왔다. 각 그림에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굳이 제목을 보지 않고도 주제파악이 금방 되고 웃음이 빵 터졌다. 그것이 카툰의 장점인가 보다. 색상이 밝고 화려하고 동물들이라 가볍게 생각될 수 있겠지만 무거운 주제들도 효과적으로 잘 드러내어 가볍지만은 않았다.

“극화만화 같은 경우는 기본적인 스토리를 다 읽어봐야만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데 카툰은 한 컷 안에 다 들어있어서 전시 하기가 용이하죠. 시각적인 효과도 강하고 또 홍보용 그림으로도 쓸 수 있고 캐릭터 상품을 만들기도 하고 하나의 작품으로 파생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2010년도에 첫 전시를 했는데 반응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내년쯤에 다시 개인전을 할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인 작품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제가 만화를 전공하고 99년도에 졸업하면서 바로 일요신문사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스포츠투데이를 거쳐 지금은 아시아경제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신문사 일 외에는 카툰 작업이나 카툰 전시회, 학습만화, 만화 교육 등의 작업을 하는데 어차피 만화라는 틀 안에서 있다 보니 이런저런 일을 겸하게 되네요. 카툰협회에서 조만간 노인전을 기획하고 있는데 관련단체에서 의뢰를 받았습니다. 작가들이 한 작품씩 출품해서 전시회를 할 계획입니다.”


“카툰협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걸로 압니다.”
“한국카툰협회가 정식 명칭이고 전국 카툰 작가들의 모임입니다. 회원은 50여명 정도 되는데 생각보다 회원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극화만화가 소설이라면 카툰은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들의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것처럼 카툰작가들도 만화잡지에서 점점 설 자리가 줄어들고 연재할 지면이 없어지니까 많이 힘든 실정입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은 많은데 카툰만으로는 힘드니까 일러스트나 삽화를 겸하는 작가들도 있고 저처럼 신문사에서 일하는 작가들도 있고. 카툰협회는 현재 만화계의 원로이신 사이로 선생님과 만화가협회 회장인 조관제 선생님 등이 원로그룹을 형성하고 있고 그 밑에 중견그룹이 있고 저를 비롯해서는 3그룹에 속해 있습니다. 제 밑으로 젊은 친구들은 좀 적은 편인데 학교에서 카툰과목이 점점 없어지면서 접해볼 기회가 적어진 것 같습니다. 사회에 나와서 카툰을 접하고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만화시장은 커졌지만 상황은 여전히 열악
“만화관련 학과를 개설하는 학교가 많아지고 애니메이션 시장도 커지면서 만화의 전망이 좋은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만화 애니메이션, 양적으로 커진 것 같지만 옛날이 더 좋았다고 얘기하기도 하죠. 요즘은 매체도 많이 달라지고 예전처럼 만화를 직접 사서 보려고 하지 않죠. 그러다보니 만화시장이 점점 죽어요. 대여점에서 보는 것도 거의 일본 만화고요. 그나마 웹툰(인터넷 만화)이라는 장르가 있기 때문에 한국만화가 유지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웹툰 시장도 들여다보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또 한편으로는 대학에 만화과가 너무 많이 생기다보니 포화 상태가 된거죠. 일할 곳은 한정되어 있는데 갑자기 많은 인력이 쏟아지다 보니 상황이 열악해진 것입니다. 또 대학 만화교육이 좋은 작품을 만드는 작가를 양성하는게 아니라 기술적인 것을 가르쳐 주고 겉핧기 식으로 가르쳐 놓으니까 실질적으로 창작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작가가 되는 거예요. 많은 수의 작가에 비해 그렇게 높은 수준의 만화작품이 나오지는 않는 실정입니다. 이건 매체가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고 학생들이 기술만 가지고 나오기 때문이기도 하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죠. 만화학과에 갔을 때는 모두 이현세나 허영만 선생 같은 극화 만화가를 꿈꾸죠. 하지만 스토리 만화라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사실은 소설 쓰는 거나 마찬가지죠. 소설 창작하는 공부를 해야 해요. 또 미술 공부도 해야 하고. 만화 그리는 일은 완전 노동이죠.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90년도에 공주전문대에 만화예술과가 처음으로 생기면서 95년을 거쳐 2000년이 되면서는 만화의 인기에 힘입어 대부분의 대학에서 만화관련학과를 개설할 정도로 붐이 일었다. 안동에도 있고 대구에도 생겼다. 그러나 포화상태가 되면서 멀티미디어과나 다른 쪽으로 커리큘럼을 바꾸면서 이제는 점차 정리하는 추세에 있다.
“현재 만화의 현주소를 알 수 있는 것을 하나 예로 든다면 윤태호 작가 같은 경우죠. 인터넷에 연재를 해서 인기가 있으면 단행본으로 묶어냅니다. 이현세 선생님처럼 작품 활동을 해서 책을 내는 분들이 몇 분 있기는 하지만 그건 원고료 받기도 힘든 실정입니다. 그러다보니 작가들이 개인적인 작품 보다는 학습만화 쪽으로 많이 넘어갔어요. 현재 만화시장의 70-80%를 학습만화가 차지하고 있어요. 학습만화 시장에 의존하고 있는 작가가 많이 있죠.”
“속을 들여다보면 나름의 문제점들이 다 있네요. 제가 듣기론 요즘 부천이 만화의 메카로 떠오르고 있다고 하던데요?”
“예 맞습니다. 부천이 만화정보센터로 시작해서 현재는 한국만화진흥원이 있고 큰 행사들이 부천에서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둘리가 부천 명예시민이기도 하죠. 남산에 한국애니메이션 센터가 있어서 그동안 남산이 메카였는데 점차 부천으로 옮겨가고 있지요. 큰 만화 행사로는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이라고 있어요. 스카프라고 하는데 만화관련 다양한 행사가 열려 이때 만화작가들이 다 모이죠. 서울에서는 5월 정도에 행사가 있고, 부천에는 8월 정도에 하는데 굉장히 크게 합니다. 현재 만화 작가들의 단체를 보면 한국만화가협회라고 제일 규모가 크고 한국카툰협회가 있고 우리만화연대가 있습니다. 이 세 개가 순수한 작가들의 단체인데 연합체 형식으로 하나를 만들자고 현재 추진하고 있습니다.”


“학교 그만두고 장태산 작가 문하생 되고 싶었죠”
그는 젊은 카툰 작가 모임 ‘엎어컷’활동도 열심이다.
“2004년도에 카툰을 좋아하는 공주전문대 만화가 출신들이 모여 만든 단체입니다. 엎어는 엎는다는 의미의 엎어고 컷은 만화의 컷을 의미하는 데 이 모임을 통해 작품 활동을 계속 해오고 있어요. 홈페이지도 있는데 7명이 돌아가면서 하루에 하나씩 작품을 올리면 매일 새로운 작품이 올라가게 되는 거죠. ‘엎어컷(http://www.uppercut.co.kr/)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는 알아줍니다. 홈페이지에 맴버들과 제 이름이 있는데 각자이름을 클릭하면 자기의 작품이 나옵니다.”


“저도 어릴 때 만화 보는 것을 무지 좋아했는데 만화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못했네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만화가가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기억나는 친구가 두 명 있는데 한 친구는 그림을 정말 잘 그렸어요. 사람을 신기할 정도로 똑같이 그렸어요. 또 한 친구는 교과서 빈 공간에 조그만 캐릭터를 빼곡히 그려 놓았는데 캐릭터 하나하나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이름도 이상무여서 만화가 이상무처럼 만화가가 되지 않을까 했는데 지금 뭐하는지 궁금해요. 거기에 비하면 저는 그렇게 잘 그리지 못했어요. 그냥 만화가 좋았던 거죠. 저는 선생님이 버린 원고지를 주워 와서 책으로 묶어서 거기에다가 칸을 쳐서 나름대로 캐릭터를 만들어서 만화를 그렸어요. 그 두 친구와 그림 그리면서 만화 얘기하면 너무 좋았어요. 만화를 꼭 배워야겠다 생각했죠.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장태산이라고 굉장히 유명한 만화작가에게 편지를 썼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답장이 왔어요. 제가 보낸 내용은 ‘지금 당장 때려치우고 선생님께 만화를 배우러 가고 싶다’였어요. 선생님 말씀이 ‘지금 현재는 그런 상황이 아니고, 공부 열심히 하고 그림 공부도 게을리 하지마라’였죠. 그분이 자신의 그림을 복사해서 그 뒷면에 편지를 써서 보냈어요. 오지마라는 편지였는데도 너무 좋아서 어머니한테 학교 그만두고 만화 그리러 간다고 말씀드렸죠. 어머니는 당연이 절대로 안 된다 하죠. 그때 결심해서 올라왔다면 문하생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르죠.”

 
스물여덟 살의 만화과 신입생
부모님의 반대로 서울 상경을 못한 그는 대구에 있는 학교로 진학해 국문학을 전공했다. 당시엔 만화과가 없었고 혼자 만화공부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꿈을 접다시피 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마치고 안동대 출신 형들과 내일신문 안동사업부 일을 몇 개월간 했다.
“정말 우연하게 신문을 보다가 만화과 모집 요강을 보게 되었어요. 바로 이거다 하고 대구로 내려가서 미술학원에 등록했지요. 미술 선생님이 그림이 뭐 이러냐고 하대요. 만화 그리듯이 했으니까요. 선배 집에 얹혀살면서 새벽에는 신문배달하고 낮에는 학원 다녔어요. 다음 해에 공주전문대학 만화예술과에 들어갔죠. 28세에 그 학교 교문에 들어가면서 너무 좋았어요. 믿어지지가 않았죠.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죠. 당시에는 나이든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없었어요. 선배들도 저보다 어리고 같이 들어간 사람 중에 한 살 많은 누나가 한 명 있었는데 나중에 제 아내가 되었죠. 나이가 들어서 가니까 너무 공부가 재밌어요. 학점도 잘 나오고 장학금도 받게 되고. 집사람이 저보다 더 열심이었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이제 뭐가 필요한지 뭘 해야할지 알게 된거죠. 데생도 많이 하고 행사장에 가서 캐리커처도 그려주고, 과제가 굉장히 많았는데 너무 즐거웠어요. 극화창작, 일러스트, 판화, 카툰 이런 과목들이 있었는데 그때 카툰의 매력에 눈을 떴어요. 하지만 그때는 하나만 하기보다 여러 가지를 다 했죠.”


맘껏 만화를 그리며 열심히 학교생활을 했지만 정작 2년이 지나고 나서는 좀 막막했다. 취직도 해야 되고, 막판에 연애를 하다보니까 결혼도 해야 하고. 그의 아내도 직장 다니다가 회화공부가 하고 싶어서 만화과에 오게 되었는데 다시 시골로 돌아가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살림을 합치자 해서 안동에서 간소하게 결혼식을 하고 인천으로 와서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만화 학원에서 강사를 하다가 소개로 일요신문에 일러스트를 하게 되었는데 지면을 내줘서 셀러리맨들의 일상을 그린 만화 ‘샐러리꼴레리’를 연재하게 되었다. 걱정했던 것 보다는 시작이 좋았다.


안정된 직장을 가져야 작품활동이 가능한 현실
“아는 분이 돈을 모으려면 정규직원이 되어야 한다고 하대요. 그래서 지금은 없어졌지만 스포츠투데이 정식 기자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러나 경영상 문제가 있어서 희망퇴직서를 쓰고 나왔어요. 막상 프리랜서가 되고 나니까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어요. 아이들이 둘 있었는데 가족들이 있다 보니 더 힘들었죠. 몇 년을 힘들게 보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아시아경제신문에서 연락이 와서 2007년도부터 지금까지 일하고 있어요. 프리랜서로 있는 동안 학교에서 만화교육도 하고 학습만화도 좀 했는데 직장생활을 하면서 고정수입이 있어야만 다른 일을 할 수가 있겠더라고요. 우리 신문이 석간이라 오전 11시에 마감이에요. 그래서 6시 30까지 출근을 해요. 집이 파주인데 거기서 오려면 4시 50분에는 일어나요. 오후에 다음날 신문 작업을 하고나면 6시 퇴근이구요. 근무 시간이 좀 길죠.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면 카툰 작업하면서 만화쪽 일에만 전념하고 싶죠. 하지만 생활고 때문에 만화를 포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저는 행운아죠.”


대학 때 학생운동도 많이 하고 신문사에 근무를 해서 그런지 얘기를 하면서도 자신만의 문제 보다는 만화 시장 전체에 대한 고민과 만화작가들의 환경개선 등 만화예술 전반에 관한 계획이 항상 먼저였다. 만화작가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미래이기도 하고 후배들의 길이기도 하기 때문인 듯 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졸업하고 사회 나와서 갈 데가 없어요. 만화과 출신들이 나와서 가는 게 신문사나 애니메이션 회사, 게임회사예요. 가장 많은 친구들은 프리랜서고. 만화의 언저리에는 살고 있지만 정작 만화작가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인터넷 매체가 늘어나긴 했지만 원고료 보장이 안 되는 경우도 허다하죠. 나름 소원이 있다면 우리 카툰협회에서 돈을 좀 모아서 공모전을 해보고 싶어요. 카툰의 위상도 높이고 만화 전체의 위상도 높이고 좋은 작가도 발굴하고. 숙원사업이에요.”

 
수몰된 고향, 지금도 그려지는 애달픈 유년
그는 수몰된 고향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제가 임하면 사의리에 살았는데 임하댐 수몰민이에요. 임하면도 여러 동네가 있는데 물 바로 옆에 살아서 어릴 때는 거의 물에서 놀았는데 댐이 생기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보상이 되면서 2학년 때 이사 나왔어요. 영양으로 이사 갔다가 지금은 일직면에 부모님이 계세요. 형님과 누님은 안동에 있고. 그때 같이 놀았던 친구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어요. 고향이 물에 다 잠겨서 갈 수가 없어요. 지금도 생각하면 동네 그림이 다 그려져요. 그게 머릿속에만 있는 거죠. 친구놈은 사진기를 들고 동네를 다 찍어놓았더라고요. 일직에 부모님이 계시지만 부모님이 계신 동네지 고향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사실은 추석 때도 내려가겠지만 내가 뛰어놀던 동네가 아니기 때문에 굉장히 낯설어요. 집사람도 시골이 고향인데 자기 동네에 내려가면 없어진 집들도 많고 구조도 바뀌고 그랬다고 갈 때마다 아쉬워하는데 저는 어떻겠어요. 추석 때 벌초하러 배 타고 들어가면 물에 잠긴 봉우리만 보여요. 저는 어디가 어딘지 모르는데 부모님들은 다 알죠. 그때 가면 마음이 너무 애잔해요. 어른 분들은 추석 때나 벌초 할 때 다 오시니까 배타는 곳에서 술판이 벌어지죠. 너무 오랜만에 만나니까. 저도 친구들을 거기서 만나기도 하고. 뭐 자랑할 것도 못되죠.”


그런 그에게 수몰민의 애환 같은 것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보는 건 어떨지 제안해 보았다.
“만화가든 어느 누구든 경험하지 못한 것은 잘 구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취재를 많이 가잖아요. 하여튼 제 얘길 좀 해보자 그런 생각은 가지고 있는데 아직은 그림 실력이 딸려서 못하고 있죠. 그런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이건 딴 이야기지만 예전에는 안동에 시골에서 올라온 자취생들이 많았잖아요. 그러다보니 연탄가스 사고도 종종 있었고요. 제 바로 위에 누나가 그렇게 갔어요. 중학교 2학년 때 누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었죠. 그때는 실감도 안 나고 뭐가 뭔지 잘 몰랐어요. 시간이 갈수록 느껴지고 그 일로 어머니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굿을 했는데 그걸 보니 팍 느껴지더라고요. 제게도 큰 충격이었어요. 살면서 겪었던 그런 아픔들이 내면화 되어 있어요. 그게 삶의 힘이 되기도 하죠. 이런 일도 겪었는데 하면서.”


세상을 향한 엎어컷!
언젠간 그의 내면화된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창작해 내길 그래서 그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래보았다. 그리고 그는 가지고 온 아이패드를 열어서 책을 한권 보여줬는데 소위 말하는 e북이라는 것이었다.
“이건 비틀즈의 옐로우 서브머린(노란잠수함)을 e북으로 만든 것인데 신기합니다. 그림들이 움직이고 음악도 나오고 글도 읽어주죠. 이렇게 동영상도 있고. 이제 이런 시대가 되었어요. 제 카툰집도 이런 e북으로 만들 수 있어요. 이런 시도를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많은 비용을 주고 출판사에 의뢰하지 않아도 되고 작가 스스로가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북스토어에 등록하기도 쉽고 홍보가 따로 필요하지도 않고요. 책으로 발매하는 것보다 간편하다고 할 수 있죠. 카툰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창의력을 키우는데 좋은 도구가 되는데 아이들을 위한 교육적인 e북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스마트 환경을 잘 이용하면 좋겠죠.”


지금은 아이들 때문에 창작활동을 못하고 있지만 그의 아내도 우수한 만화학도였기 때문에 만화에 관해서는 함께 의논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나는 좋지만 다른 사람도 그런지 아내를 통해서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춘다.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도 많은데 단기적으로는 대학원 논문을 마무리 짓는 것과 작품집을 내고 개인전을 여는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카툰협회나 ‘엎어컷’을 통해 만화작가들과 공동으로 만화예술의 발전을 위한 나름의 전망을 가지고 있다. 만화를 무척 좋아했고 만화작가가 되길 소원하여 만화작가의 삶을 사는 이영우 씨. ‘나도 안동사람입니다’ 하고 큰 소리로 말해도 되겠다.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142호>


 


직녀 12-11-16 11:33
답변  
  대학 시절부터 알고 지낸 형,
한동안 연락도 끊어진 채 지내다가
수년 전부터 우연히 연락이 닿아
가끔 안부 전하고 삽니다.
착하고 부드러운 줄만 알았는데
그 안에 강함이 숨어 있었어요.
가고 싶은 길을 묵묵히, 힘있게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
우연히 이 기사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응원하고픈 마음에 옮겨왔습니다.

영우형~~~ 언제나 응원합니다.
 
   
 

 
    

Copyright ⓒ 2013 우리들농장 All Rights Reserved

상호:농업회사법인 (주)우리들 대표:이은경 사업자등록번호:512-81-23053 통신판매업신고:제2008-경북예천-00032호
전화 : 054-652-7170, 010-9388-7170 주소 : 경북 예천군 감천면 복골길 38-6 개인정보관리책임자: 이은경